옷을 키우는 목화학교

2018년 내 손으로 목화 농사지어 조끼 만들기까지

2018년 내 손으로 목화 농사지어 조끼 만들기까지

2018년 내 손으로 목화 농사지어 조끼 만들기까지

2012년 봄 누군가 ‘내 손으로 직접 목화를 심어보고 솜을 따서 그 솜을 넣은 옷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고, 그 막연한 생각에 도전을 해보자고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목화두레가 탄생했다. 

그해 4월, 목화두레는 군포시 속달동 볕 잘 드는 땅에 목화씨를 심었다. 그러나 한 달이 가깝도록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애가 타는 중에 도시농부학교 강사분 중에 여러 모종을 키우는 분이 계셨는데, 목화 모종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200포기를 공수해왔다. 5월 중순, 목화 씨를 심은 곳 옆에 괭이질로 땅을 고르고 적으나마 거름도 뿌렸다. 봄 가뭄이 심해 옮겨 심은 모종이 말라죽기도 했지만 물도 주고 오줌 액비도 주며 살살 달래다보니 대부분이 기특하게 잘 자라주었다. 게다가 포기했던 목화 씨 심은 곳에서도 싹이 올라왔다. 심은 씨앗의 10% 정도만 겨우 싹을 틔웠는데,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목화두레 사람들은 모두 목화에 문외한이고, 주위에 목화농사를 지어본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어서 어디 물어볼 데가 없었다.

봄이 가고 초여름으로 접어드니 오줌 거름의 힘 덕분인지 목화는 키가 사람 허리께까지 자랐다. 5월 중순에 모종을 구해다 심어서 늦은 게 아니었나 마음 졸였는데, 얼마나 다행이던지. 그런데 목화는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라 4월에 심든 5월에 심든 일정 온도 이상으로 올라가야 잘 자란다고 한다. 물론 이런 지식은 목화 농사를 지으며 답답해서 인터넷과 책을 뒤져보다 발견했다.

목화가 무성하게 자라는 만큼 풀도 무성해서 틈틈이 모여 풀을 매주었다. 오가는 우리들 발자국 소리와 관심 속에서 7월이 되자 목화가 꽃을 피웠다. 생애 처음으로 목화꽃을 본 우리는 감격스러운 기쁨을 맛보았다. 목화는 꽃이 세 번 핀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뜻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하얗게 꽃을 피우더니 점점 꽃잎이 분홍빛으로 바뀌었다. 사전에는 아침에 흰꽃을 피우고 저녁에 분홍꽃으로 진다고 한다. 그러다 꽃이 진 자리에 다래(목화 열매)가 열리고 8월 말 열매가 익어 하나둘 팝콘처럼 ‘팡팡’ 터지면서 눈부시게 하얀 목화솜이 피어났다. 또 다시 생애 처음으로 목화송이를 본 우리는 감사의 마음으로 숙연해지까지 했다.

 

그 사이 장마와 태풍 등으로 쓰러진 목화도 많았다. 주렁주렁 다래가 달리니 무게 때문에 비라도 세차게 내리면 쓰러지기 일쑤였다. 쓰러진 채 다래가 땅에 닿아 솜꽃을 피우면 곰팡이가 생겨서 못쓰게 되었다. 또 미처 솜을 따지 못했는데 비라도 오면 큰일이었다. 비를 맞은 솜은 곰팡이가 피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못쓰게 된 솜을 보면 아까워서 비가 온 뒤에는 쓰러진 목화를 세우러 가고, 비가 온다는 예보라도 있으면 솜을 따러 달려갔다.

다래는 먼저 열린 것부터 익기 시작해서 8월부터 11월 서리 내리기 전까지 목화송이를 피웠다. 두 달 넘게 솜을 따러 목화밭을 뻔질나게 오가야 했다. 수확해 온 솜은 바로 잘 펼쳐서 며칠씩 말려야 했다. 서리를 맞은 다래는 얼어서 더 이상 피지 않았다. 사실 서리를 맞혀 얼어버린 다래가 아까울 정도로 많았다. 나중에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서리가 내리기 전에 목화 줄기를 베어 말리면 다래가 벌어진다고 했다. 비록 솜이 품질 면에서는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런 솜이라도 우리에겐 너무도 귀했을 것이다.

말로만 들었던 것들을 농사지으며 하나하나 겪으니 온통 새로운 경험이었다. 심지어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왜 노예제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2달 넘게 매일 피는 목화솜을 하나하나 손으로 수확해야 하는 ‘노동집약적 농사’가 바로 목화농사였다. 목화솜을 딸 때 풀씨나 목화의 마른 잎이라도 섞여 들어가면 하얀 솜에 잡티가 생겨서 안 좋았다. 그런 잡티가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그만큼 섬세한 손길이 필요했다.

200여 포기 목화에서 생각보다 많은 양의 솜을 수확했다. 기후 조건도 그다지 좋지 않았고 목화 농사가 처음이라 시행착오도 많았던 것에 비하면 좋은 성과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솜과 씨를 분리하는 지난한 작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래는 4~6쪽으로 갈라지며 솜을 피웠다. 한 쪽의 솜에는 씨가 10~20알씩이나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목화송이 하나에는 씨앗이 자그만치 40~120알이 들어 있다는 말씀!

옛날 씨아(목화씨와 솜을 분리해내는 전통 기구)를 갖고 계신 분이 있어 빌려왔지만 오랜 세월 사용하지 않아서 기계적인 문제인지 사용법을 잘 모르는 우리의 서투름 때문인지 결국은 씨아 사용을 포기해야 했다. 몇 사람이 씨아에 매달려봤지만 솜과 씨앗은 분리되지 않고 기계만 헛돌았다. 기대를 걸었던 씨아를 포기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일이 손으로 씨를 빼는 원초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각자 솜을 나누어 가서 틈 날 때마다 씨를 빼기도 하고, 누구네 집에 하루 모여 같이 수다를 떨며 빼기도 했다. 누구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씨 빼기를 하고, 누구는 남편이랑 아이들에게 분량을 할당하기도 했으며 누구는 TV 보면서도 손은 열심히 움직여 씨를 뺐다. 그야말로 겨우내 인해전술로 그 많은 솜에서 씨 분리하기를 끝내고 솜 트는 집에 맡겨 옷 만들 솜이 완성되었다.

목화두레에 전통누비를 가르쳐줄 선생님이 함께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솜으로 솜누비 조끼를 만들기로 했다. 놀랍게도 8명분의 조끼를 만들고도 추가로 작은 소품 하나씩 더 만들 양이 되었다. 소중한 재능을 기부해주신 선생님 지도 아래 우리는 본을 뜨고 마름질을 하여 솜누비 조끼 만들기에 들어갔다. 바늘땀 사이를 짧고 고르게 해야 하는 전통누비는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작업이었다. 선생님만큼 바늘땀이 총촘할 수는 없어 제각각 듬성듬성, 비뚤비뚤이었다. 게다가 나는 줄 간격을 2cm로 누비는 걸 포기하고 조끼 뒷판은 5cm로, 앞판은 2.5cm로 누벼서 조금이라도 공정을 줄이기로 했다. 그 바람에 솜이 뭉칠까봐 지금까지 조끼를 빨지 못하고 있다. 하하.

목화 농사 짓고 그 솜으로 조끼를 만들었던 한 해를 돌아보면 누군가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도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입는 옷 하나하나를 귀하게 대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은 단지 ‘옷’이라는 사물에 국한되지 않았다. 내 삶의 태도를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금 더 생태적이고 소박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인생을 대하는 자세도 변화한다.”(<디엔디파트먼트에서 배운다>, 나가오카 겐메이 글, 에피그람 펴냄)라는 말처럼.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본 사람은 그 사물에서 온기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내 인생의 흔적이 담겨서 다시 돌아보고 쓰다듬게 된다. 1년 남짓한 시간을 들여 만든 목화솜 조끼가 바로 그랬다. 이제 내 삶의 한 순간순간, 흔적들을 담은 사물들을 더 많이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